다치바나 도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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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치바나 도세쓰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1513년에 태어나 1585년에 사망했다. 그는 분고 국의 호족인 베키 씨의 가신으로 성장하여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오토모 소린을 섬기며 규슈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특히 뛰어난 검술 실력과 군사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벼락을 맞아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가마를 타고 다니며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용맹했다. 다치바나 도세쓰는 오토모 가문의 쇠퇴 속에서도 충성을 지키며, 다치바나 씨의 당주로 임명되어 지쿠젠 국의 방어를 책임졌다. 그는 손자병법을 탐독하고 독창적인 전술을 개발하는 등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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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도세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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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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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벳키 아키츠라 |
이명 | 통칭: 손지로, 좌위문대부, 호키노카미, 기이뉴도, 탄고뉴도, 셋츠뉴도 별명: 오니도세츠, 번개신, 규슈의 군신, 활과 화살 야하타, 마리지천의 화신 |
신호 | 매악영신 |
계명 | 복엄원전전단슈태수매악도설대거사 |
묘소 | 후쿠오카현신구정의 바이갓쿠지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의 후쿠겐지 |
관위 | |
관위 | 좌위문대부, 기이노카미, 호키노카미, 단고노카미 |
생애 | |
출생 | 에이쇼 10년 3월 17일 (1513년4월 22일) |
사망 | 덴쇼 13년 9월 11일 (1585년11월 2일) |
가계 | |
씨족 | 후지와라 북가히데사토류오토모 씨족 (벳키 씨, 다치바나 씨) |
아버지 | 벳키 치카이에 |
어머니 | 유후 고레츠네의 딸, 쇼코인 |
계모 | 우스키 나가카게의 딸, 요코인 |
배우자 | 정실: 이리타 치카자네의 딸, 하츠 (하쿠산인) 계실: 우라베슈 다와라 씨의 딸 (이설) 계실: 몬쥬쇼 아키토요의 딸, 니시 측실: 무나카타 마사우지의 딸, 이로히메 |
자녀 | 친딸: 다치바나 고토에 (15세에 요절), 벳키 마사치요 (12세에 요절, 생모 불명), 다치바나 긴치요(다치바나 무네시게 정실) 양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벳키 시게쓰라, 다치바나 미치키요, 야스타케 마사키요 양녀: 벳키 치카노부의 딸 (오노 시게유키)의 아내, 야스타케 시게노리의 딸 오요시 (메다치 시게히사)의 아내, 다카하시 쇼운의 딸 가이 (다치바나 시게이에)의 아내, 유후 고레아키라의 딸 (오오토리이 노부이와 아내) |
경력 | |
주군 | 오토모 요시아키 → 요시시게 → 요시무네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지쿠고 슈고다이, 지쿠젠 슈고다이 |
주요 전투 | 우메가타케성 전투 구루마가에시 전투 (1535년) 아키즈키 반란 진압 (1546년) 분고 평정 (1554년) 히고 평정 고쇼산성 공방전 (1557년) 모지성 공방전 (1561-1562년) 제1차 야나기가우라 전투 (1562년) 모지성 공방전 (1563년) 제4차 야나기가우라 전투 (1564년) 야스미마쓰성 공방전 (1563년) 야스미마쓰 전투 고쇼산성 공방전 (1567년) 호만산성 공방전 (1567년) 야마쿠마성 공방전 (1567년) 다치바나산 전투 (1568-1569년) 다치바나성 공방전 제2차 다치바나성 공방전 다타라하마 전투 (1569년) 이마야마 전투 (1570년) 사가성 전투 (1570년) 후쿠오카 전역 (1571-1583년) 준노하라 전투 / 야기야마 전투 (1581년) 제5차 이마마쓰바라 전투 (1582년) 이와토 전투 (1582년) 사와라 전투 (1582년) 고가네바라 전투 (1582년) 고노미다케성 공방전 (1583년) 분고국 재정복 (1584년) 구루메 공방전 (1585년) 네코오성 공방전 (1585년) |
기타 | |
가독 상속 | 1571년 ~ 1575년 |
후임 | 다치바나 긴치요 |
2. 생애
2. 1. 유년 시절 및 가독 상속
다치바나 도세쓰는 1513년 3월 17일, 분고국 오노군(오노장) 오노고 후지키타(오이타현분고오노시오노마치)의 요로이타케 성 성주 베키 친이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16] 어릴 적 이름은 하치만마루였다.[216] 장형은 요절했기 때문에 적자로 키워졌다.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또한 병약하여, 계모(아버지의 후처이자 우스키 아키토시의 누나)에 의해 길러졌다. 14세에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보좌 노신 3명과 함께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이것이 첫 출진이었다.[216] 부젠우마가타케 성 (현재의 후쿠오카현유쿠하시시)을 공격, 3,000명 정도 우세한 오우치 군에 승리하고 개선했다.[5][6][216][217][218][219]
1526년, 아버지 친이에가 사망하자 베키 씨의 가독을 상속하고, '''치카모리''', '''치카카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가독 상속 후 오토모 요시아키를 섬기며, 그의 편휘를 받아 '''아키츠라'''로 개명했다.
1535년 8월 22일, 히고국에서 기쿠치 씨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고, 쿠루마가에시 전투 이후 반란군을 제압했다.[7][8][220][221][222][223] 1546년에는 아키즈키 씨족의 첫 번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16][224][225]
1548년, 도세쓰는 벼락에 맞아 왼쪽 다리가 영구적으로 마비되었다.[12]
1550년에는 오토모 씨족의 내전에 연루되어 오토모 소린의 편에서 싸웠다.[13]
2. 2. 니카이쿠즈레의 변
1550년(덴분 19년) 2월, 오토모 요시아키가 적자 요시시게를 폐적시키고, 삼남 시오이치마루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발한 요시시게 파 가신들이 요시아키를 습격하는 니카이쿠즈레의 변이 발생했다. 요시아키는 이 변으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며칠 후 사망했다. 이 때, 다치바나 도세쓰(당시 이름은 카게츠라)는 요시시게를 지지하여 그의 가독 상속에 힘썼다. 또한, 니카이쿠즈레의 변 직후 아소 씨를 의지해 히고국으로 도망친 시오이치마루 파의 이리타 치카나리를 추토하고, 더 나아가 히고에서 기쿠치 요시타케를 토벌하고 구마모토 성을 함락시켰다.1554년(덴분 23년) 11월 20일에는 사가라 씨에게 호송 중이던 기쿠치 요시타케를 분고 나오이리 군 기하라에서 자결하게 했다.[226][227][228] 코지 2년 5월에는 오하라 아키모토 등이 일으킨 모반(성씨 대립 사건)을 히고, 분고에서 토벌하는 등[229][230][231][232][233][234][235] 전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 3. 모리 가문 및 지쿠젠 세력과의 전투
1553년, 41세의 도세쓰는 벳키 가문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 이복 조카인 벳키 시게쓰라를 양자로 들여 가문의 다음 수장으로 임명했다.[14] 1554년, 분고와 히고에서 오바라 아키모토, 혼조 신자에몬, 나카무라 신베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15][16][17] 1556년 5월 19일, 오바라 아키모토의 반란을 진압한 후, 유후 고레노부 등 활약한 가신들을 칭찬하는 서신을 보냈다.[18]1557년, 모리 모토나리의 지원을 받은 아키즈키 기요타네가 반란을 일으키자, 오토모 소린은 도세쓰와 우스키 아키스미에게 2,000명의 병력을 주어 진압하게 했다. 도세쓰는 고쇼 산성을 포위했고, 결국 기요타네와 그의 아들은 성 안에서 세푸쿠했다.[19][39] 1558년, 모리 가문의 장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모지 성의 첫 번째 공방전에서 800명의 궁병을 배치하여 고바야카와의 군대에 화살을 퍼부었다.[19]
1560년,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는 무나카타 가문의 수장인 무나카타 우지사다와 싸웠다.[20][21] 오토모 가문의 적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도세쓰는 소린에 의해 지쿠고 국의 ''가반슈''(개인 보좌관)와 ''슈고다이''(지사)로 임명되었다.[22] 1561년, 모지성 공방전 동안 포르투갈 제국 상인들은 500~600톤 사이의 선박 3척으로 도세쓰를 지원했으나, 포르투갈이 탄약을 소모하고 철수한 후 오토모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23]
1562년, 도세쓰는 부젠국의 야나가우라 전투에서 모리 씨족 군대를 격파했다.[163][164] 10월 13일, 모지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25] 11월 26일, 모지 성 근처에서 하루 종일 전투가 벌어져 수백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25] 1563년, 모리 다카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대군이 도착하여 아시카가 막부의 중재로 전투를 중단했다.[25] 같은 해 도세쓰는 이름을 아키쓰라에서 '''도세쓰'''로 바꿨다.[26][27][28]
1564년 7월 25일, 쇼군의 사절은 모리 씨와 오토모 씨 사이에 휴전을 성사시켰으나,[29] 3월 25일 제4차 야나가우라 전투에서 다시 모리 씨 군대와 싸웠다.[30] 1565년, 다치바나 씨의 당주 다치바나 무네카쓰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세쓰는 다치바나야마 성을 함락시켰으나, 오토모 소린은 다치바나 무네카쓰를 사면했다.[31][32][33][34]
1567년, 아키즈키 타네자네가 오토모씨로부터 고쇼 산의 성을 탈환하려 하자, 소린은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에게 20,000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8월 14일에서 15일에 걸쳐 아마미즈와 하세야마 전투(우류노 전투)에서 아키즈키 씨 군대와 교전했고, 야스미마츠 성의 지성인 오조를 점령했다.[36] 도세쓰는 고쇼 산 성을 점령하기 위해 야스미마츠 성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성은 튼튼히 방어되었고 포위전은 길어졌다. 모리씨 군대가 오조를 침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으로 오토모군은 9월 3일에 야스미마츠 성을 포기했다. 타네자네는 12,000명의 병력을 나누어 도주하는 오토모군을 추격했다. 도세쓰는 3,000명의 병력으로 후위대를 배치했지만,[35][36] 타네자네 군의 공격으로 도토키 고레타다 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 밤에 타네자네는 4,000명의 병력으로 야습을 감행하여 오토모군은 4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도세쓰는 군대를 진정시키고 질서정연한 퇴각을 조직했으나, 타네자네 군은 지쿠고 야마쿠마 성에 이르기까지 추격하여 오토모군은 더욱 많은 사상자를 입었다.[36] 벳키 아키타카 등 도세쓰의 많은 가신들이 전사했다.[37] 8월에 도세쓰는 호만 산 성으로 진군하여 아키즈키 군과 전투를 벌였고, 11월 15일, 오토모 소린은 도세쓰를 파견하여 아키즈키 씨와 더 전투를 벌여 호만 산에 있는 적의 성을 점령했다.[38][39] 도세쓰는 긴 칼을 무장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65] 그 해 말, 도세쓰는 타네자네로부터 야마쿠마 성을 점령했다.[40][41]
1568년, 모리 모토나리는 시미즈 무네노리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다치바나 산성을 포위했으나, 도세쓰의 군대는 성을 지켜냈다. 도세쓰의 가신 4명이 "도세쓰 시텐노"(도세쓰의 사천왕)라는 별명을 얻었다.[32][17] 모리의 침략에는 다치바나 무네카쓰도 연루되었는데, 그는 오토모 씨족을 두 번째로 배신했다.[42] 소린은 도세쓰, 요시히로 아키마사, 시가 치카모리에게 3만 명의 병사로 다치바나 산성을 포위하게 했다. 7월 4일, 다치바나 산 절벽에 있는 다치바나의 지성(支城)을 공격하여 무네카쓰의 병사 28명을 포로로 잡았다.[43] 무네카쓰의 가신 중 한 명이 도세쓰의 편으로 돌아서 오토모 군을 도와 성을 함락시켰다.[19] 7월 23일, 무네카쓰는 성 안에서 자결했다.[44] 도세쓰와 다카하시 시게타네는 모리 씨의 지원군에 대한 작전을 계속했다.[45] 7월 29일, 도세쓰와 다른 오토모 장군들은 다치바나 산 지역의 남은 저항 세력에 대한 정리 작전을 시작했고, 8월 2일 시미즈 무네노리와 하라다 다카타네가 이끄는 5천 명의 모리 씨족 병사가 다치바나 산에 도착했다.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는 다치바나 산 기슭에서 모리 씨족 군과 교전하여 승리했고 300명 이상의 모리 군이 포로로 잡혔다.[46][47]
11월 25일, 도세쓰는 지쿠고 아카시 성에 입성하여 오토모의 가신인 몬츄쇼 아키토요의 딸인 히토시히메와 결혼했다.[48]
1569년, 도세쓰는 다치바나 산성 전투의 실패한 방어전에 연루되었는데,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적군은 대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도세쓰 군을 패배시켰다.[49] 도세쓰가 성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보급 부족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같은 해 말, 도세쓰는 타타라 지역에서 모리 씨족에 맞서 오토모 군을 직접 이끌고 최소 4번의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는 교착 상태로 끝났다.[50]

5월 18일, 타타라하마 전투에서 여러 차례 교전한 후,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가 이끄는 오토모 군은 기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의 4만 병력과 격돌했다.[51][52][53][54] 격렬한 전투 중, 도세쓰는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 10명 이상을 죽였고, 노부키 나라자키가 이끄는 요시카와 모토하루의 선봉 부대를 격파했다. 요시카와 모토하루는 철포를 사용하여 반격했다. 도세쓰가 타카카게 군의 진형 틈새로 돌격하여 다른 도세쓰 장군들이 재정비하고 포병을 재배치할 수 있었다. 도세쓰는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든 채 적진으로 돌격했다. 모토하루와 타카카게의 군대는 저항할 수 없었고 밀려났다.[55]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타타하마 전투 이후 도세쓰와 모리 군 사이에 이 지역에서 약 18번의 교전이 더 있었지만 결과는 불확실했다.[29]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오우치 테루히로에 의해 자국 영토가 위협받으면서 모리 씨족은 다치바나 산성을 도세쓰로부터 방어하려는 의지를 갑자기 잃었다. 모리는 평화를 요청했고, 오토모는 다치바나 산성을 그들에게 반환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56]
1570년 4월 23일, 도세쓰는 류조지 타카노부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와 이마야마 전투에서 싸웠다. 도세쓰는 전투 중 장애가 있는 왼쪽 다리를 지원하기 위해 처음으로 가마를 탔다고 기록되었다.[57] 9월까지 사가성의 동쪽 측면에서 류조지 군과 교전하기 위해 더 진격했고, 그 후 도세쓰는 류조지 타카노부와 휴전을 협상했다.[58][59]
2. 4. 지쿠젠 수호대로서 북규슈 각지 전전
1553년, 41세의 도세쓰는 벳키 가문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 이복 조카인 벳키 시게쓰라를 양자로 들였다. 도세쓰는 즉시 시게쓰라를 벳키 가문의 다음 수장으로 임명했다.[14]1554년, 도세쓰는 분고와 히고에서 오바라 아키모토, 혼조 신자에몬, 나카무라 신베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5][16][17] 1556년 5월 19일, 도세쓰의 군대는 오바라 아키모토의 반란을 진압했고, 도세쓰는 이 작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가신들을 칭찬하는 서신을 보냈다.[18]
1557년, 모리 모토나리의 지원을 받은 아키즈키 기요타네가 이끄는 아키즈키 가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모 소린은 도세쓰와 우스키 아키스미를 2,000명의 병력과 함께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도세쓰는 고쇼 산성을 포위했고,[19] 기요타네와 그의 아들은 성 안에서 세푸쿠했다.[39]
1558년, 도세쓰는 모리 가문의 장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모지 성의 첫 번째 공방전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도세쓰는 800명의 궁병을 배치하여 고바야카와의 군대에 화살을 퍼부었다.[19]
1560년,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는 무나카타 가문의 수장인 무나카타 우지사다와 싸웠다.[20][21] 오토모 가문의 적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도세쓰는 소린에 의해 지쿠고 국의 ''가반슈''(개인 보좌관)와 ''슈고다이''(지사)로 임명되었다.[22]
1563년, 에이로쿠 6년 정초에 모리 다카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대군이 도세쓰의 모지성 포위군을 구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도세쓰와 모리 다카모토는 교토에서 온 아시카가 막부의 사자가 양측에게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전달할 때까지 싸웠다.[25] 같은 해 도세쓰는 이름을 아키쓰라에서 '''도세쓰'''로 바꿨다.[26][27][28]
1564년 7월 25일, 쇼군의 사절은 모리 씨와 오토모 씨 사이에 잠정적인 휴전을 성사시켰다.[29] 그러나 이 휴전은 오래가지 못했고, 3월 25일 제4차 야나가우라 전투에서 도세쓰는 다시 한번 유후 고레마키가 이끄는 모리 씨 군대와 싸웠다.[30]
1565년, 다치바나 씨의 당주 다치바나 무네카쓰가 오토모 씨에 반란을 일으켰다. 도세쓰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고,[31][32] 결국 도세쓰의 군대는 반란군 소속의 다치바나야마 성을 함락시켰다.[33] 그러나 오토모 소린은 가문 관계 때문에 다치바나 무네카쓰를 사면하기로 결정했다.[34]
1567년, 아키즈키 키요타네의 아들이자 아키즈키 씨의 새로운 수장인 아키즈키 타네자네는 오토모씨로부터 고쇼 산의 성을 탈환하고 그들과 대립했다. 8월 14일, 소린은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에게 20,000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타네자네를 응징하게 했다. 오토모군은 야스미마츠 성의 지성인 오조를 점령하여 성의 지휘관인 사카타 모로마사가 자결하게 만들었다.[36] 도세쓰는 고쇼 산 성을 점령하기 위해 야스미마츠성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성은 튼튼히 방어되었고 포위전은 길어졌다. 모리씨 군대가 오조를 침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오토모군은 고쇼 산 포위를 철수하고 9월 3일에 야스미마츠 성을 포기했다. 타네자네는 12,000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도주하는 오토모군을 추격하기로 결정했다. 도세쓰는 부관들을 지원하여 3,000명의 병력으로 후위대를 배치했다.[35][36] 이 공격 중에 타네자네의 군대는 도세쓰 군대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도세쓰 군의 후위대는 상황을 반전시켜 타네자네 군에 큰 피해를 입혀 그들을 퇴각시켰다. 밤에 타네자네는 4,000명의 병력으로 야습을 다시 감행하여 오토모군은 혼란에 빠졌고 4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도세쓰는 군대를 진정시키고 질서정연한 퇴각을 조직했다. 타네자네 군은 도주하는 도세쓰의 군대를 더욱 추격하여 지쿠고 야마쿠마 성에 이르렀고, 오토모군은 더욱 많은 사상자를 입었다.[36] 이 전투에서 벳키 아키타카 등 도세쓰의 많은 가신들이 전사했다.[37] 8월에 도세쓰는 호만 산 성으로 진군하여 아키즈키 씨와 전투를 벌였다. 그는 아키즈키 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결국 도세쓰가 이끄는 과감한 돌격으로 아키즈키 군을 극복할 수 있었다.[38][39] 11월 15일, 오토모 소린은 도세쓰를 파견하여 아키즈키 씨와 더 전투를 벌였고, 도세쓰는 호만 산에 있는 적의 성을 점령했다.[39] 도세쓰는 이 전투에서 긴 칼을 무장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65] 그 해 말, 도세쓰는 타네자네로부터 야마쿠마 성을 점령했다.[40][41]
1568년, 모리 모토나리는 시미즈 무네노리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다치바나 산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도세쓰의 군대는 성을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도세쓰의 가신 4명이 전투에서 명성을 얻어 "도세쓰 시텐노"(도세쓰의 사천왕)라는 별명을 얻었다.[32][17] 모리의 침략에는 다치바나 씨족의 수장인 다치바나 무네카쓰도 연루되었는데, 그는 오토모 씨족을 두 번째로 배신했다.[42] 그해 말, 소린은 도세쓰, 요시히로 아키마사, 시가 치카모리를 파견하여 3만 명의 병사로 다치바나 무네카쓰가 방어하는 다치바나 산성을 포위하게 했다. 7월 4일, 그들은 다치바나 산 절벽에 있는 다치바나의 지성을 공격하여 무네카쓰의 병사 28명을 포로로 잡았다.[43] 그날 밤 늦게, 무네카쓰의 가신 중 한 명이 도세쓰의 편으로 돌아서 오토모 군을 도와 성을 함락시켰다.[19] 7월 23일, 다치바나 산의 여러 요새가 함락된 후, 무네카쓰는 마지막 남은 성으로 도주했고, 오토모 군은 그를 추격하여 무네카쓰가 성 안에서 자결하기에 이르렀다.[44] 같은 날, 도세쓰와 다카하시 시게타네는 무네카쓰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모리 씨족의 지원군에 대한 작전을 계속했다. 도세쓰와 다카하시 시게타네의 대치는 다음 날 밤까지 계속되었는데, 도세쓰는 모리 군의 보급 기지를 야습하여 모리 군을 퇴각시켰다.[45] 7월 29일, 도세쓰와 다른 오토모 장군들은 다치바나 산 지역의 남은 저항 세력에 대한 정리 작전을 시작했고, 8월 2일 시미즈 무네노리와 하라다 다카타네가 이끄는 5천 명의 모리 씨족 병사가 다치바나 산에 도착했다. 이 새로 도착한 적에 맞서기 위해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는 다치바나 산 기슭에서 모리 씨족 군과 교전했다. 이 전투는 오토모의 승리로 끝났고 모리 씨족 군은 궤멸되었으며 300명 이상의 모리 군이 포로로 잡혔다.[46][47]
11월 25일, 도세쓰는 지쿠고 아카시 성에 입성하여 오토모의 가신인 몬츄쇼 아키토요의 딸인 히토시히메와 결혼했다.[48]
1569년, 도세쓰는 다치바나 산성 전투의 실패한 방어전에 연루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적군은 대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도세쓰 군을 패배시켰다.[49] 같은 해 말, 도세쓰는 타타라 지역(현재의 후쿠오카현 히가시구에 위치)에서 모리 씨족에 맞서 오토모 군을 직접 이끌고 최소 4번의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는 교착 상태로 끝났다.[50]
5월 18일, 타타라하마 전투에서 여러 차례 교전한 후, 도세쓰, 우스키 아키스미, 요시히로 아키마사가 이끄는 오토모 군은 기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의 4만 병력과 격돌했다.[51][52][53][54] 격렬한 전투 중, 도세쓰는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 10명 이상을 죽였고, 노부키 나라자키가 이끄는 요시카와 모토하루의 선봉 부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요시카와 모토하루는 철포를 사용하여 반격했다. 도세쓰가 타카카게 군의 진형 틈새로 돌격하기 전까지 오토모 측에게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이를 통해 다른 도세쓰 장군들이 재정비하고 포병을 재배치할 수 있었다. 도세쓰는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든 채 적진으로 돌격했다. 모토하루와 타카카게의 군대는 저항할 수 없었고 밀려났다.[55]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타타하마 전투 이후 도세쓰와 모리 군 사이에 이 지역에서 약 18번의 교전이 더 있었지만 결과는 불확실했다.[29] 이 시점에서 모리 씨족은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오우치 테루히로에 의해 자국 영토가 위협받으면서 다치바나 산성을 도세쓰로부터 방어하려는 의지를 갑자기 잃었다. 그리고 모리는 평화를 요청했고, 오토모는 다치바나 산성을 그들에게 반환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56]
1570년 4월 23일, 도세쓰는 류조지 타카노부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와 이마야마 전투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도세쓰는 전투 중 장애가 있는 왼쪽 다리를 지원하기 위해 처음으로 가마를 탔다고 기록되었다.[57] 이 전투 후, 도세쓰는 9월까지 사가성의 동쪽 측면에서 류조지 군과 교전하기 위해 더 진격했고, 그 후 도세쓰는 류조지 타카노부와 휴전을 협상했다.[58][59]
1571년, 도세쓰는 다치바나 씨의 공식 수장으로 임명되어 다치바나 성을 받았다.[60] 그는 이제 다치바나야마 성을 지배하게 되었고, 분고 국 북서부의 방어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61] 더욱이 도세쓰는 또한 지쿠젠 국의 ''슈고다이''로 승진하여, 이제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62] 같은 해, 도세쓰는 옛 적의 누이인 무나카타 우지사다의 여동생 무나카타 이로히메를 첩으로 삼았다. 도세쓰는 59세였고, 이로히메는 25세였다.[63]
1575년, 도세쓰는 가신인 고모노 마스토키를 다치바나 씨의 후계자로 입양하려 했다. 그러나 마스토키는 입양을 거절했고, 도세쓰는 다치바나 씨의 후계자를 딸의 외동딸인 다치바나 긴치요로 바꾸었다.[64] 도세쓰는 오토모 소린으로부터 긴치요를 다치바나 씨의 후계자로 임명하는 승인을 받았다.[65] 소린이 허락하자마자 도세쓰는 다치바나 씨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당시 7세에 불과했던 긴치요를 다치바나 씨의 수장으로 임명했다.[39] 도세쓰는 또한 오토모 씨의 ''가로''(수석 관리) 직에서 물러나 지쿠젠 국의 군사 지휘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66][67]
1578년, 도세쓰와 다카하시 시게타네는 쓰쿠시국에서 군사 작전을 펼쳐 지쿠젠국의 이와야성을 평정하고 시바타강에서 멈췄다.[68] 같은 해 말, 오토모 씨는 시마즈 씨에게 미미가와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겪었다. 도세쓰는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배교와 기독교 개종에 책임을 돌렸다.[69] 오토모 씨가 미미가와에서의 패배로 인해 가신들의 대규모 이탈을 겪었지만, 도세쓰는 충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토모 씨 영토의 변방에 위치한 다치바나성은 이제 적의 침략에 취약해졌다.[70]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류조지 타카노부는 쓰쿠시 히로카도와 아키즈키 타네자네와 협력하여 지쿠젠을 침략했고, 도세쓰와 그의 군대는 이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16]
1579년 1월 중순, 도세쓰는 아키즈키 씨를 상대로, 쓰쿠시국과 다자이후에 대한 두 번째 오토모 침략에 참여하여, 아키즈키 타네자네가 타카토리야마성을 포위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도세쓰는 이와야성을 두 번째로 포위했다.[71][72][73][74][75] 3월, 도세쓰는 아키즈키 타네자네의 군대와 몇 차례 충돌을 겪으며 이와야성을 세 번째로 포위했다.[76][77][78][79][80] 그 후, 도세쓰는 지쿠젠국의 야타케 전투에서 아키즈키 씨의 군대와 교전했다.[81] 4월 18일, 도세쓰는 아키즈키 타네자네에게 속임수를 써서 그를 속여 아키즈키 타네자네에게 쫓기고 있던 오토모 씨의 장군 시가 치카모리를 구출했다.[76][77][82][78][80] 7월 12일부터 18일까지, 도세쓰는 나마마쓰하라 전투에서 하라다 노부타네를 격파했다.[83][84] 7월 27일, 도세쓰는 타네자네와 노부타네의 연합 공격을 격퇴했다.[85] 8월 18일부터 9월 초까지, 도세쓰는 타타라하마, 하코자키, 그리고 아게마쓰성 근처에서 각각 하라다 노부타네, 무나카타 우지사다, 그리고 스기 씨의 군대와 세 번의 전투를 벌였다.[86][87][4] 9월, 도세쓰와 다른 오토모 장군들은 아라헤이성, 이케다성, 코소야마성 등에서 아키즈키, 류조지, 무나카타, 하라다 씨의 연합군과 다섯 번의 전투를 치렀다.[88][89][90][91][92][93]
11월 15일부터 12월 29일까지, 도세쓰는 쓰쿠시 히로카도와 하라다 씨와 같은 아키즈키 씨와 그 동맹군을 상대로 다섯 차례 교전에 참여했다.[94][95]
도세쓰는 겐키 2년(1571년) 지쿠젠국 수호대에 취임하여 다치바나 가문의 명맥을 잇고 다치바나야마 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때부터 도세쓰는 지쿠젠의 군사권을 쥐게 되어 가반슈를 사임했다.[323][324]
이후 도세쓰는 다카하시 소운, 오쓰루 시게마사, 오타베 시게모토, 우스키 시게쓰구, 키츠키 아키자네 등과 함께 지쿠젠에서 수년간 아키즈키 타네자네, 지쿠시 히로카도, 하라다 타카타네, 타하라 아키나오, 류조지 타카노부, 소마 씨사다, 아소 모토시게, 스기 렌나미, 몬추쇼 아키카게 등 지쿠젠, 지쿠고, 히젠 여러 세력에 대해 수많은 전투를 반복했다.
덴쇼 3년(1575년), 소린의 명령으로 긴치요에게 가독을 양보하고 다치바나야마 성주로 했다.[257] 덴쇼 9년(1581년), 다카하시 소운의 아들 무네토라를 사위 양자로 맞이하여 가독을 양보했다.[448][449][450]
2. 5. 오토모 가문의 기둥과 최후
1580년, 도세쓰는 오토모 요시무네의 13명의 중신들에게 서신을 보내 오토모 가문의 영토 내에서 기독교의 확산을 비난했다.[96] 그해 2월 2일, 지바현 사와라에서 류조지 가문의 군대와 싸웠으며,[97] 5월에는 무나카타 우지사다로부터 지쿠젠의 성을 함락시켰다.[98] 9월 10일에는 후쿠오카의 요시카와 지역에서 우지사다와 충돌했고,[83] 10월에는 가마-호나미 전투, 이시가키 산 전투, 야기야마 이시자카 전투가 잇따라 일어났다.[99][100][101][102] 11월 3일부터 12월까지는 아키즈키 타네자네와 무나카타 우지사다의 군대와 싸웠다.[102][103][104]
1581년, 도세쓰는 아키즈키 타네자네를 상대로 여러 차례 교전에 참여했다. 후쿠오카현 구라테군에서 벌어진 코가네바라 전투에서 타네자네와 우지사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105][106][107] 이후 시미즈하라와 다카토리 성에서 다시 타네자네와 싸웠다.[108] 7월 27일, 다자이후 간제온지 제2차 전투에서는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109][110]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무네시게가 도세쓰에게 입양되어 다치바나 가문의 당주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기록했다.[111] 도세쓰는 쇠퇴하는 오토모 가문을 방어하기 위해 다카하시 가문과 다치바나 가문을 모두 이끌 강력한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무네시게를 다치바나 가문의 당주로 삼았다.[112][113]
11월 6일, 가마와 호나미로 행군 중 아키즈키 타네자네 군대와 전투가 벌어져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14][115][116][117][118][119] 1582년 2월 10일, 이마 마츠바라 제5차 전투에서 하라다 가문의 군대와 싸웠고,[120][121][122] 3월 16일에는 코노미 산 전투에서 우지사다 군대와 싸웠다.[123][124] 4월 16일, 이와토 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26][127] 이와토 전투에서 도세쓰는 기습 부대를 이끌고 적을 포위했으며, 무네시게의 부대는 측면 공격을 가해 승리했다.[128][129][130][131]
10월 2일, 요네노야마 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아키즈키 가문의 병사 200명이 살해되었다.[132][133] 11월 12일, 오토모 가문의 가신 모리 시즈마로부터 다카토리 마을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고, 다음 날 미야와카시에서 무나카타 우지사다의 군대에게 기습을 받았으나 반격하여 격퇴했다.[134] 11월 14일, 다시 우지사다 군대와 충돌했고, 다음 날 후쿠쓰시의 미야지 마을을 점령했다. 도세쓰가 1582년에 참여한 마지막 군사 작전은 12월 22일에 발생했다.[134]
1583년 1월부터 2월까지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서 쓰쿠시 가문과 싸웠고,[135] 2월부터 4월까지 쓰쿠시 히로카도의 공격을 막아냈다.[135][136][137] 4월 23일, 코노미다케 성을 공격하여 적을 도주하게 만들었다.[138][139]
1584년 3월, 류조지 다카노부가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사망한 후, 오토모 씨족은 분고국을 침공하여 류조지 씨족의 영토를 재정복하려 했다. 그러나 네코오 성 함락에 실패하자, 8월 18일 도세쓰와 다카하시 시게타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40] 도세쓰와 시게타네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쿠고 강 등을 건너 진격하여 쓰쿠시 씨족과 아키즈키 씨족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쿠사노 씨족과 호시노 씨족을 격파하고, 8월 20일 다카무레 성을 공격, 8월 24일에 항복을 받아냈다.[140] 이후 이누오 성을 함락시켰고,[140] 8월 25일, 오카고야 산으로 이동하여 현지 사무라이 씨족들의 항복을 받았다.[141][170][142] 8월 28일, 조지마 성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143] 9월 8일부터 11일까지, 여러 지쿠고국 성들을 함락시켰고, 9일에는 야나가와 성 주변의 여러 마을을 불태웠다.[143]
10월 3일, 타케이 성을 공격하여 파괴했고, 10월 28일, 호신다케 성으로 후퇴한 적을 추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다카토리 성/호시노 성(야마노나카 성)과 후쿠마루 성을 함락시킨 후, 11월 14일에 이노우에 성을 함락시켰다.[144] 아키즈키 씨족의 영토를 불태운 후, 미즈마 지구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키즈키 씨족의 군대가 오토모 씨족 군대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작전을 중단하고 다와라 산으로 돌아가 진영을 세웠다.[145]
```wikitable
구루메 공방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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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1585년 | |
* 장소: 구루메, 지쿠고 국, 규슈 | |
* 결과: 오토모 씨 승리, 공방전 실패 | |
참전 세력 | |
오토모 씨 | 반 오토모 연합 (류조지 씨, 아키즈키 씨, 쓰쿠시 씨, 나베시마 씨 등) |
지휘관 | |
다치바나 도세쓰, 다카하시 시게타네 | 류조지 이에하루, 쿠사노 친에이,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
병력 | |
9,800명 | 30,000명 |
1585년, 지쿠고 국의 네코오 성 포위전 중, 도세쓰는 병에 걸렸다.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직감한 도세쓰는 가신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갑옷으로 무장시켜 야나가와 성을 바라보는 고라 산에 매장하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9월 11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55][156] 그러나 다카하시 시게타네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적이 퇴각 후에 도세쓰의 시신을 훼손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시신을 함께 퇴각했다. 사망 당시 도세쓰는 몸의 절반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37번의 주요 전투와 100번이 넘는 소규모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57][158][159]
도세쓰는 오토모 씨족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지만, 자신의 군주를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160][3] 1578년 오토모 소린이 규슈 남부의 시마즈 씨족을 정복하려 하자, 도세쓰는 이 정책을 반대했다. 소린이 미미가와 전투에서 패배하자, 도세쓰는 소린을 비판했지만, 많은 가신들이 오토모 씨족을 이탈할때도, 도세쓰는 충성을 유지했다. 한번은 소린이 애완 원숭이와 파티를 즐기는 데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일본 부채로 소린의 애완 원숭이를 죽이기도 했다. 1563년에 자신의 이름을 헤츠기에서 도세쓰로 변경했는데, 이는 "길의 눈"을 의미하는 도세쓰를 눈에 덮인 길처럼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상징하며, 죽을 때까지 자신의 길을 바꾸거나 주인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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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5년, 도세쓰는 반 오토모 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방어전에 참여했다. 연합군은 30,000명에 달했으며, 도세쓰와 다카하시 시게타네는 9,800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연합군은 구루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146] 도세쓰와 시게타네는 뛰어난 기동과 전술로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을 상대로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146][147] 4월 8일, 야나가와를 공격하여 적군을 사살하고 적 장군을 사로잡았다.[148] 이후 다카라 산에 진을 치고, 4월 18일에 하쓰신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149] 구루메 주변 전투에서 반 오토모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150][151][152][153] 4월 23일, 이에하루와 히로카도는 예비군 16,000명을 투입하여 구루메를 포위했으나, 도세쓰와 시게타네는 숙련된 포병 일제 사격, 방어 대형 전술, 시기 적절한 반격을 조합하여 연합군의 포위를 붕괴시켰다.[154]
1585년, 지쿠고 국의 네코오 성 포위전 중, 도세쓰는 병에 걸렸다. 9월 11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55][156] 도세쓰는 몸의 절반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37번의 주요 전투와 100번이 넘는 소규모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57][158][159]
덴쇼 6년(1578년), 오토모 소린의 시마즈 씨 토벌에 반대했지만, 미미카와 전투에서 오토모 군은 대패를 겪었다. 도세쓰는 소린과 그의 적자 오토모 요시무네, 그리고 이 전투를 지휘한 중신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후 오토모 씨는 시마즈 씨에 대해 수세에 몰렸지만, 다카하시 쇼운과 함께 시마즈 씨와 계속 싸웠다. 덴쇼 7년(1579년)에는 무나카타 씨 등의 반란을 진압했다. 덴쇼 8년(1580년) 2월 16일에는 분고 남군중의 배신을 우려하여 9개 조의 격문을 발표했다.
덴쇼 8년(1580년) 가을, 료조지 씨의 지쿠젠 원정이 시작되었고, 지쿠시 히로카도의 중재로 도세쓰는 료조지 씨와 화해했다.
덴쇼 12년(1584년)의 오키타나와 전투에서 료조지가 패배하자, 오토모 씨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기회로 보고 분고국의 오토모군은 쿠로키 이에나가의 지쿠고 네코오 성을 공격했지만, 전선은 교착되었다. 8월 18일, 도세쓰와 쇼운은 오토모 요시무네의 출병 요청을 받아 출진하여, 험난한 산길을 넘어[454] 아키즈키, 지쿠시, 쿠사노, 호시노 연합군을 물리치고 (타누시마루초・카타세, 에리도구치・이시가키오모테 전투), 8월 19일 저녁, 네코오 성의 지성・타카무레 성에 도착했다. 20일에 도세쓰는 곧바로 성장・츠바키하라 씨부를 조략하여, 24일에 타카무레 성은 개성 항복하여, 토이 이에자네도 성에서 사가로 돌아갔다.[455] 이어서 이누오 성의 카와사키 시게타카도 항복하고, 25일에는 카와사키의 오오코모리 산으로 진지를 옮겼지만, 지쿠고 코라산 좌주・탄바 료칸 등도 오토모군에 가세했다.[456][457][458]
28일, 도세쓰 일족의 타치바나 시게자네를 장수로 800의 별동대를 이끌고 반도사에 들어가 조지마 성을 공격했다. 타치바나 세력은 타케사코 카게타네와 아베 치카츠네가 용전하여 수 명을 쓰러뜨리고 성의 외곽을 파괴했지만, 성주 니시무타 씨가 이끄는 300 성병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도세쓰와 쇼운의 본대는 사케미・에노키즈・코호 등의 마을을 불태우고, 야나가와의 성하町에 이르렀다. 성주 료조지 이에하루가 농성에 전념한 것으로[459], 양 장은 성하町을 불태운 후, 군세를 돌려 코라산에 있던 오토모 제장과 군의를 열어 네코오 성의 총공격을 결정하고, 9월 1일 (일설에는 5일) [460]에 함락시켜 쿠로키 이에나가는 자결했다.[461][462][463]
9월 8일부터 11일까지, 카마치 시게유키의 야마시타 성이나 타니가와 성, 헤베스 성, 카네마츠 성, 야마자키 성 등 지쿠고 제성을 항복・공략했다. 이 기간 중 9일에 야나가와 성 주변에 작은 전투가 있었고,[464] 10일에 카미세타카・시모세타카・타카오 촌을 불태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도사에 진을 치고, 분고 오토모군의 총대장・타하라 치카이에와 군의하여 미즈마 군의 니시무타 촌・사케미 촌・에노키즈 부근 수백 채의 민가를 불태우고, 산몬군 내의 료조지 측의 제성을 공격하여 성주・타지리 칸타네가 부재했던 타카오 성도 점령했다.
다음으로 지쿠고 최대의 요충지・야나가와 성의 공략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이 성은 규슈 유수의 난공의 물성이었고, 그 지성, 햑타케 켄켄의 아내・엔큐니가 진수하는 카마후네츠・햑타케 성도 같은 수로가 얽히고 늪지가 자연의 요새가 되어 난공의 성이었고, 공략의 진전이 없었다. 그 때문에, 10월 3일에는 지쿠고 코라산 좌주・탄바 료칸의 권유도 있어, 코라산으로 철수하고, 10월 4일, 양군은 쿠사노 시게나가의 타케이 성을 진공하여 이 성을 불태웠다. 28일, 핫신가쿠 성으로 도망간 쿠사노를 추격했지만, 천험을 이용하여 축조한 이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병사를 돌려 호시노 요시자네의 다카토리 성・호시노 성(야마노나카 성)・후쿠마루 성, 그리고 11월 14일에 토이추쇼 코스미의 이노우에 성을 공격하여 견제했다[465], 더 나아가 아키즈키 령의 아마키, 아마미 부근까지 불태운 후, 다시 한 번 미즈마 군의 제성을 소탕했다. 그 때, 타하라 치카이에와 아키즈키 군과의 싸움은 패배했으므로, 도세쓰와 쇼운은 코라산으로 돌아가 쿠치아미 칸야스, 시가 치카모리 등과 합류하여, 코라산을 중심으로 지쿠고 강을 따라 야나기사카에서 키타노에 포진한 채, 해를 넘겼다.[466] 12월 8일 (일설에는 10월 28일)에는 쿠사노 시게나가 위장 항복의 모략으로, 젠도지 전투에서 수 명의 중신을 잃었다.[467][468][469][470]
덴쇼 13년(1585년) 2월 상순부터 4월 23일까지 료조지 마사이에・료조지 이에하루・나베시마 나오시게・에가미 이에타네・고토 이에노부・지쿠시 히로카도・하타 치카시・쿠사노 시게나가・호시노 요시자네・아키즈키 타네자네・토이추쇼 칸케이・조이 시게후사, 나가노 타네노부, 센슈 씨 등 히젠, 지쿠젠, 지쿠고, 부젠 연합군 약 30,000여 명의 대군과 코모리노,[471][472] 쥬산베,[473] 센본스기, 기온하라 등 (총괄하여 쓰츠가와 합전이나 구루메 합전)[474][475]에서 수많은 격전이 있었지만, 도세쓰와 쇼운, 칸야스, 료칸 등 오토모군은 9,8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국지적으로 승리하여, 쓰러뜨린 잡병 수백 및 갑주 머리 합계 약 470의 전과를 거두었지만, 료조지 측에 타격을 주기에는 이르지 못했다.[476][477][478]
6월, 야나가와 성 공격 중 도세쓰는 코라산의 진중에서 병을 얻었다. 코라 대사 (현재의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서 병의 평유를 기원하는 기도가 행해졌고, 행동을 함께 했던 다카하시 쇼운도 필사적으로 간병했다. 그러나 도세쓰는 9월 11일에 병사했다.[480][481] 향년 73세였다. 사세는 "이방에, 마음 끌지 마라, 토요쿠니의 쇠의 활 끝으로 세상은 될지라도."
10월 28일에 오토모 요시무네가 도세쓰의 아내에게 준 서장은, 도세쓰를 애도함과 동시에, 생전의 충절을 현창하고, 또한 이후의 후실을 위로한 것이다.
3. 사후
묘소는 후쿠오카현신구정의 매악사와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의 복엄사에 있다.
덴메이 3년(1783년) 3월 18일에는 도세쓰에게 '매악령신'의 신호가 증신되었다[199]。
또한 야나가와 성의 북동(귀문)에 위치한 미하시라 신사에 양자인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딸 다치바나 긴치요와 함께 제신으로 모셔져 있다. 무신, 군신, 수리·간척·개전·향토 번영·개척·선도의 수호신으로서, 최근에는 공적을 인정받아 필승·취직·재취직·부활의 신사로 숭앙받고 있다[485]。
4. 인물됨
도세쓰는 엄격한 규율가로, 지쿠젠 가와라사키에서 류조지 씨족과의 전투 중, 허가 없이 진영을 떠난 병사들과 그들의 부모까지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장교들이 간청했음에도, 도세쓰는 부모 역시 죄가 있다고 고집했다.[161]
도세쓰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치우치 니 묘 오 에타루'(사방으로 베는 기술)라는 검술을 익혔다고 한다.[162] 1562년 야나기가우라 전투에서 모리 씨족의 장군 3명을 직접 죽였다고 한다.[163][164] 같은 전투에서 적군 7명을 베어 죽이고 '오니-도세쓰'(귀신-도세쓰)라는 별명을 얻었다.[165] 1569년 모리 씨족과의 전투에서는 최소 10명의 적군을 직접 죽였다.[55]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도세쓰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으며, 류조지 다카노부는 도세쓰를 "무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당대 최고의 군사 인물"이라고 칭찬했다.[193] 가이국의 다케다 신겐은 도세쓰와 싸워 그의 전투 기술을 시험해 보고 싶어했지만, 영토 사이의 거리가 멀어 안타깝다고 말했다.[193][166] 도세쓰의 법호 유래는 "길에 떨어진 눈은 사라질 때까지 장소를 바꾸지 않는다. 무사도 한 번 주군을 얻으면 죽을 때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고 헌신하는 것이 무사의 본분이다"라는 것이다.[195]
오이타시 쓰루사키에는 무형 민속 문화재인 쓰루사키 춤이 있는데, 이 춤의 기원은 도세쓰이다. 소린이 출가 전 젊은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도세쓰는 교토에서 미인 무용수를 불러 춤을 추게 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소린은 도세쓰의 저택에 왔고, 도세쓰는 "주군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무"라며 간언했다. 소린은 도세쓰의 간언을 받아들여 마음을 바로잡았다.
『오토모 흥폐기』에 따르면, 도세쓰는 젊은 시절(35세)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덴분 17년(1548년) 6월 5일, 도세쓰가 뙤약볕 아래 큰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번개가 떨어질 뻔했는데, 라이키리라는 칼로 번개를 베어내고 왼쪽 다리가 불구되었지만, 용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1562년 야나기가우라 전투에서 모리 측 세 명의 장수를 직접 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1567년 야스마쓰 전투에서는 7명을 베고 '오니 도세쓰'라고 불렸다. 1568년 타치바나 아키토시 토벌에서 스스로 창을 들고 분전했다. 1569년 타타라하마 전투에 스스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기록이 있어, "젊은 시절에 낙뢰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것이 창작인지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년의 도세쓰는 가신에게 손 가마를 들게 하고, 자신은 가마에 앉아 칼과 총을 옆에 두었다. 겐키 원년(1570년) 이마야마 전투에 종군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교전했을 때, 처음으로 가마를 탔다는 기록이 있다. 텐쇼 7년(1579년) 키츠키 아키자네의 칸자키 산성을 식량 구원하러 가는 길에, 도세쓰는 정식으로 가마를 타고 후방에서 독전했다. 텐쇼 12년(1584년) 지쿠고 원정 때, 가마를 탄 채로 행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잔키단에 따르면, 도세쓰는 "무사에게 약한 자는 없다. 만약 약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대장이 격려하지 않는 죄 때문이다. 내 휘하의 무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부에 이르러도 무공이 없는 자는 없다. 다른 집에 있어서 뒤쳐지는 무사가 있다면, 우리 측에 와서 섬기면 좋다. 몰라볼 정도로 훌륭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무공이 없는 무사에게는 "운불운이 무공에는 있는 법. 네가 약한 자가 아님을 내가 정하고 있다. 내일의 싸움에 나갈 때, 꼬드김을 당해 무단으로 뛰쳐나가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불충이라는 것이다. 몸을 온전히 하여 이 도세쓰의 앞날을 보아라. 너희들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늙어서도 적의 한가운데로 나갈 수 있고, 겁먹은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술잔을 나누고, 때로는 무구를 주기도 했다. 이러한 배려에 휘하들은 다음 싸움에서 용감하게 나섰고, 도세쓰는 그 모습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이 때문에 사졸들은 도세쓰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어떤 합전에서 도세쓰의 군대가 고전하자, 도세쓰는 "나를 적의 한가운데로 옮겨라. 목숨이 아깝거든 그 후에 도망쳐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가신들은 평소의 도세쓰에 대한 감사함으로 분기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손님을 초대한 술자리에서 부하가 실수했을 때, 도세쓰는 "지금 내 부하가 실례를 했지만 이 자는 전장에서 몇 사람 몫을 해낸다. 특히 창 다루는 솜씨는 우리 집안 최고일 것이다"라고 말하여 부하에게 망신을 주지 않았다. 시녀와 밀통한 가신에게도 "젊으니 당연하다. 색정에 미혹되었다고 해서 참수할 필요는 없다. [...]"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 말을 들은 가신은 후에 도세쓰를 지키면서 전사했다고 한다.
중신이었던 고모노 마스토키는 은상으로 도세쓰의 옆에 묘소를 두고, 죽어서도 도세쓰 곁에 있기를 원하여 허락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로 다치바나 가문이 개역되자 구로다 가문의 가신이 되었지만, 이 허락을 평생 잊지 않고 죽은 후 도세쓰와 마찬가지로 바이카쿠지(梅岳寺)에 묻혔다.
군율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하여, 지쿠고 원정 때 류조지 씨와 대진 중 연말을 넘기게 되었을 때, 일부 가신이 무단으로 진지를 떠나자 추격대를 보내 그 가신뿐만 아니라 부모까지 죽이라고 명했다. 가로들이 간언했지만, 도세쓰는 "중요한 전장의 자리를 도망쳐 돌아오는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한, 그 부모도 동죄이다"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치바나 도세쓰는 평생 동안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고로 왼쪽 다리가 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도 근접전에 참여한 무장이었다. 그는 전투 중에도 부하들이 운반하는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개인용 타네가시마 총을 가마 옆에 보관했다고 한다. 약 100명의 병사가 그의 가마를 호위했으며, 도세쓰는 가마를 탄 채로 적진으로 돌격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도세쓰는 젊은 시절 벼락을 맞았으나 자신의 검 '치도리'로 뇌신을 베어 살아남았다. 이후 '치도리'를 '라이키리'로 개명했다. 현재 박물관에 보존된 '라이키리' 칼날 끝에는 벼락 맞은 흔적으로 추정되는 변색된 자국이 있다. 라이키리 외에도 도세쓰는 비젠 키요미츠가 만든 길이 85cm의 일본도를 소유했다. 1568년 7월 4일 다치바나 산 계곡 전투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창과 1553년에 제작된 나기나타 역시 다치바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도세쓰는 손자의 ''손자병법''을 탐독했으며, 육열의 조총병과 2열의 궁수로 구성된 ''호엔'' 방어 대형을 사용했다. ''나가오-가카리''라는 즉석 기동 전술은 두 열의 사격수들이 교대로 총을 쏘고 창병, 기병대가 순차적으로 돌격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화약 무기 분야를 혁신하여, 한 발에 대한 탄약과 발사체를 대나무 관이나 카트리지에 혼합하는 ''하야고'' 기술을 발명했다. 이로 인해 다치바나 가문의 조총병들은 다른 일본 조총병들보다 3배 더 빠르게 일제 사격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세쓰의 지휘하에는 "다치바나 가문의 사천왕", "도세쓰의 48 백응 무사", "다치바나의 32 창 무사", "도세쓰의 두 명왕" 등 정예 가신 부대가 있었다.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은 도세쓰의 무용에 대한 소문을 듣고 대면을 희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1558년 제1차 모지 성 전투에서 도세쓰는 활 잘 쏘는 병사 800명을 선발하여 모리 군에게 "참례(參らせ) 도지 호키노카미(戸次伯耆守)"라고 붉게 적은 화살을 쏘아 공포감을 주어 물리쳤다.
도세쓰는 손자병법의 "기정상생(奇正相生)"을 인용하여, 가신 유후 코레노부(由布惟信)와 오노 시즈유키(小野鎮幸)에게 번갈아 기(奇)와 정(正)의 장수가 되어 자신을 보좌하게 했다. 모리 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도세쓰는 『음덕태평기』에서 "전국 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칭찬받았다. 그의 전적은 대전 37회, 소전 100여 회였으며, 군신으로 칭송받았다.
4. 1. 일화
도세쓰는 오토모 씨족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지만, 자신의 군주를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160][3] 1578년 오토모 소린이 규슈 남부의 시마즈 씨족을 정복하려 하자, 도세쓰는 이 정책을 반대했다. 소린이 미미가와 전투에서 패배하자, 도세쓰는 소린을 비판했지만, 많은 가신들이 오토모 씨족을 이탈할때도, 도세쓰는 충성을 유지했다. 한번은 소린이 애완 원숭이와 파티를 즐기는 데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일본 부채로 소린의 애완 원숭이를 죽이기도 했다. 1563년에 자신의 이름을 헤츠기에서 도세쓰로 변경했는데, 이는 "길의 눈"을 의미하는 도세쓰를 눈에 덮인 길처럼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상징하며, 죽을 때까지 자신의 길을 바꾸거나 주인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160][3]
도세쓰는 엄격한 규율가로, 지쿠젠 가와라사키에서 류조지 씨족과의 전투 중, 허가 없이 진영을 떠난 병사들과 그들의 부모까지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장교들이 간청했음에도, 도세쓰는 부모 역시 죄가 있다고 고집했다.[161]
도세쓰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치우치 니 묘 오 에타루'(사방으로 베는 기술)라는 검술을 익혔다고 한다.[162] 1562년 야나기가우라 전투에서 모리 씨족의 장군 3명을 직접 죽였다고 한다.[163][164] 같은 전투에서 적군 7명을 베어 죽이고 '오니-도세쓰'(귀신-도세쓰)라는 별명을 얻었다.[165] 1569년 모리 씨족과의 전투에서는 최소 10명의 적군을 직접 죽였다.[55]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도세쓰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으며, 류조지 다카노부는 도세쓰를 "무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당대 최고의 군사 인물"이라고 칭찬했다.[193] 가이국의 다케다 신겐은 도세쓰와 싸워 그의 전투 기술을 시험해 보고 싶어했지만, 영토 사이의 거리가 멀어 안타깝다고 말했다.[193][166]
오이타시 쓰루사키에는 무형 민속 문화재인 쓰루사키 춤이 있는데, 이 춤의 기원은 도세쓰이다. 소린이 출가 전 젊은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도세쓰는 교토에서 미인 무용수를 불러 춤을 추게 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소린은 도세쓰의 저택에 왔고, 도세쓰는 "주군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무"라며 간언했다. 소린은 도세쓰의 간언을 받아들여 마음을 바로잡았다.
『오토모 흥폐기』에 따르면, 도세쓰는 젊은 시절(35세)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덴분 17년(1548년) 6월 5일, 도세쓰가 뙤약볕 아래 큰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번개가 떨어질 뻔했는데, 라이키리라는 칼로 번개를 베어내고 왼쪽 다리가 불구되었지만, 용력이 뛰어났다.[498][499][500][501][502][503]
그러나, 1562년 야나기가우라 전투에서 모리 측 세 명의 장수를 직접 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1567년 야스마쓰 전투에서는 7명을 베고 '오니 도세쓰'라고 불렸다.[505] 1568년 타치바나 아키토시 토벌에서 스스로 창을 들고 분전했다. 1569년 타타라하마 전투에 스스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기록이 있어, "젊은 시절에 낙뢰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것이 창작인지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년의 도세쓰는 가신에게 손 가마를 들게 하고, 자신은 가마에 앉아 칼과 총을 옆에 두었다. 겐키 원년(1570년) 이마야마 전투에 종군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교전했을 때, 처음으로 가마를 탔다는 기록이 있다.[509] 텐쇼 7년(1579년) 키츠키 아키자네의 칸자키 산성을 식량 구원하러 가는 길에, 도세쓰는 정식으로 가마를 타고 후방에서 독전했다. 텐쇼 12년(1584년) 지쿠고 원정 때, 가마를 탄 채로 행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4. 2. 가신에 대한 대응
조잔키단에 따르면, 도세쓰는 "무사에게 약한 자는 없다. 만약 약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대장이 격려하지 않는 죄 때문이다. 내 휘하의 무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부에 이르러도 무공이 없는 자는 없다. 다른 집에 있어서 뒤쳐지는 무사가 있다면, 우리 측에 와서 섬기면 좋다. 몰라볼 정도로 훌륭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510][511]
무공이 없는 무사에게는 "운불운이 무공에는 있는 법. 네가 약한 자가 아님을 내가 정하고 있다. 내일의 싸움에 나갈 때, 꼬드김을 당해 무단으로 뛰쳐나가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불충이라는 것이다. 몸을 온전히 하여 이 도세쓰의 앞날을 보아라. 너희들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늙어서도 적의 한가운데로 나갈 수 있고, 겁먹은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술잔을 나누고, 때로는 무구를 주기도 했다. 이러한 배려에 휘하들은 다음 싸움에서 용감하게 나섰고, 도세쓰는 그 모습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이 때문에 사졸들은 도세쓰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510] 어떤 합전에서 도세쓰의 군대가 고전하자, 도세쓰는 "나를 적의 한가운데로 옮겨라. 목숨이 아깝거든 그 후에 도망쳐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가신들은 평소의 도세쓰에 대한 감사함으로 분기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511]
손님을 초대한 술자리에서 부하가 실수했을 때, 도세쓰는 "지금 내 부하가 실례를 했지만 이 자는 전장에서 몇 사람 몫을 해낸다. 특히 창 다루는 솜씨는 우리 집안 최고일 것이다"라고 말하여 부하에게 망신을 주지 않았다. 시녀와 밀통한 가신에게도 "젊으니 당연하다. 색정에 미혹되었다고 해서 참수할 필요는 없다. [...]"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 말을 들은 가신은 후에 도세쓰를 지키면서 전사했다고 한다.[512]
중신이었던 고모노 마스토키는 은상으로 도세쓰의 옆에 묘소를 두고, 죽어서도 도세쓰 곁에 있기를 원하여 허락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로 다치바나 가문이 개역되자 구로다 가문의 가신이 되었지만, 이 허락을 평생 잊지 않고 죽은 후 도세쓰와 마찬가지로 바이카쿠지(梅岳寺)에 묻혔다.
군율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하여, 지쿠고 원정 때 류조지 씨와 대진 중 연말을 넘기게 되었을 때, 일부 가신이 무단으로 진지를 떠나자 추격대를 보내 그 가신뿐만 아니라 부모까지 죽이라고 명했다. 가로들이 간언했지만, 도세쓰는 "중요한 전장의 자리를 도망쳐 돌아오는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한, 그 부모도 동죄이다"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513][514]
4. 3. 무략
다치바나 도세쓰는 평생 동안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고로 왼쪽 다리가 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도 근접전에 참여한 무장이었다.[176][177][178][179][180][181] 그는 전투 중에도 부하들이 운반하는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개인용 타네가시마 총을 가마 옆에 보관했다고 한다.[176][177][178][179][180][181] 약 100명의 병사가 그의 가마를 호위했으며, 도세쓰는 가마를 탄 채로 적진으로 돌격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175][182]
전설에 따르면, 도세쓰는 젊은 시절 벼락을 맞았으나 자신의 검 '치도리'로 뇌신을 베어 살아남았다. 이후 '치도리'를 '라이키리'로 개명했다.[167][168][2][169][170][171] 현재 박물관에 보존된 '라이키리' 칼날 끝에는 벼락 맞은 흔적으로 추정되는 변색된 자국이 있다.[172] 라이키리 외에도 도세쓰는 비젠 키요미츠가 만든 길이 85cm의 일본도를 소유했다.[173] 1568년 7월 4일 다치바나 산 계곡 전투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창과[174] 1553년에 제작된 나기나타 역시 다치바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175]
도세쓰는 손자의 ''손자병법''을 탐독했으며,[186] 육열의 조총병과 2열의 궁수로 구성된 ''호엔'' 방어 대형을 사용했다.[187] ''나가오-가카리''라는 즉석 기동 전술은 두 열의 사격수들이 교대로 총을 쏘고 창병, 기병대가 순차적으로 돌격하는 방식이었다.[188] 또한, 화약 무기 분야를 혁신하여, 한 발에 대한 탄약과 발사체를 대나무 관이나 카트리지에 혼합하는 ''하야고'' 기술을 발명했다. 이로 인해 다치바나 가문의 조총병들은 다른 일본 조총병들보다 3배 더 빠르게 일제 사격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189]
도세쓰의 지휘하에는 "다치바나 가문의 사천왕",[32][17] "도세쓰의 48 백응 무사",[9][10][11] "다치바나의 32 창 무사",[183] "도세쓰의 두 명왕"[184] 등 정예 가신 부대가 있었다.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은 도세쓰의 무용에 대한 소문을 듣고 대면을 희망했다는 일화가 있다.[492][488] 1558년 제1차 모지 성 전투에서 도세쓰는 활 잘 쏘는 병사 800명을 선발하여 모리 군에게 "참례(參らせ) 도지 호키노카미(戸次伯耆守)"라고 붉게 적은 화살을 쏘아 공포감을 주어 물리쳤다.
도세쓰는 손자병법의 "기정상생(奇正相生)"을 인용하여,[495] 가신 유후 코레노부(由布惟信)와 오노 시즈유키(小野鎮幸)에게 번갈아 기(奇)와 정(正)의 장수가 되어 자신을 보좌하게 했다.[275][496] 모리 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도세쓰는 『음덕태평기』에서 "전국 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칭찬받았다. 그의 전적은 대전 37회, 소전 100여 회였으며, 군신으로 칭송받았다.[497]
5. 가신단
'''굵은 글씨'''로 표시된 "'''연'''", "'''설'''"이 들어간 인물은 도세쓰(간렌)에게 편휘를 받은 인물이다.
- 야스타케 호세이 (하코자키 좌주 법인, 카메키쿠마루, 토지 시게안, 도세츠의 양자)
- 유후 코레노부 (유후 겐베, 미마사카노카미, 세쓰카)
- 유후 코레사다 (유후 쿠나이, 유후 코레노부의 아들)
- 유후 코레츠구 (유후 고병위, 미마사카노카미, 유후 코레사다의 동생)
- 유후 이에츠구 (유후 카이노카미)
- 유후 코레아키 (유후 오이노스케, 코레토키, 유후 이에츠구의 아들)
- 오노 시게유키 (오노 이즈미노카미, 소잔)
- 오노 나리유키 (오노 키하치로, 시게유키의 사촌)
- 코모노 마스토키 (타치바나 미카와노카미, 겐가, 켄가)
- 탄 치카츠구 (코모노 칸게요 치카타, 한자에몬. 코모노 마스토키의 동생)
- 타치바나 나리이에 (코모노 키치에몬 야스케, 나리무네, 닛겐, 코모노 마스토키의 아들)
- 타치바나 무네하루 (토지 지로베, 도세츠의 양동생・토지 치카유키의 아들)
- 타치바나 무네츠구 (모리시타 산다유, 모리시타 쵸운의 삼남, 타치바나 무네하루의 양자)
- 타치바나 시게요시 (타치바나 엣츄노카미. 원래 지쿠젠 타치바나 씨 분가)
- 타치바나 시게유키 (야마모토 칸에몬 소칸. 원래 지쿠젠 타치바나 씨 분가, 어머니는 도세츠의 이복 여동생)
- 타치바나 무네토키 (야스타케 야자에몬 미치키요, 야스타케 호세이의 형, 도세츠의 양자)
- 토지 카네카타 (나카츠카사노다이후, 카네카타, 타하라 쇼닌의 동생, 도세츠의 삼남)
- 토지 치카유키 (마고로, 도세츠의 사남)
- 토지 시게'''렌'''(우콘다이후, 토지 카네카타의 아들, 도세츠의 유자, 토지 씨의 상속자)
- 토지 치카히사 (토지 카가노카미, 미카와노카미, 우쿄노스케, 소신, 도세츠의 숙부)
- 토지 치카나가 (토지 오미노카미, 치카토시, 도세츠의 숙부)
- 토지 카네히 (토지 효부쇼유, 카네카타, 토지 치카나가의 아들)
- 토지 시게히 (토지 효부쇼유, 신스케, 토지 카네히의 아들)
- 토지 치카노부(지부쇼유, 도세츠의 큰 숙부)
- 토지 치카시게(게이부쇼유, 토지 치카노부의 아들, 도세츠의 종숙부)
- 토지 시게토키(게이부쇼유, 토지 치카시게의 아들)
- 타치바나 시게자네 (토지 우에몬다유, 료킨, 토지 치카시게의 차남)
- 타치바나 카네사다 (토지 나오사다, 탄조노츄, 타치바나 시게자네의 동생)
- 토지 치카무네(지부쇼유, 토지 치카시게의 동생, 도세츠의 종숙부)
- 토지 시게나오(지부쇼유, 토지 치카무네의 아들)
- 토지 시게에이(가쿠라노스케, 토지 치카무네의 차남)
- 토지 시게히데(카타가세야마 시로노카미, 소케츠)
- 키도 토모마사 (부젠노카미)
- 키도 키요타네 (키도 사에몬노죠, 부젠노카미, 키도 토모마사의 아들)
- 오다베 무네후사 (오다베 토사노카미, 신스케)
- 요네타비 시게히사 (타치바나 산자에몬, 단바노카미)
- 토키 토다다 (토키 우콘다이후, 코레사다. 토키 야마나리모리 코레야스의 아들)
- 토키 코레나오 (토키 신에몬, 큐신. 토키 코레타다의 막내 동생, 양자)
- 토키 '''렌'''슈 (토키 요고로, 게이부쇼유, 토키 코레타다의 아들, 토키 종가를 잇는다)
- 토키 코레츠구 (토키 셋츠노카미)
- 토키 '''렌'''사다 (토키 마고에몬, 셋츠노카미, 셋사이, 토키 코레츠구의 차남)
- 토키 코레나가 (토키 이즈미노카미. 토키 카와치노카미 코레겐의 아들)
- 토키 코레모토 (토키 칸게요 효에, 코레키. 코레나가의 아들, 코레미치의 형)
- 토키 코레히사 (토키 덴에몬 코레미치/'''렌'''큐. 코레나가의 차남. 이명: 생마리시텐. 비티관 전투에서 전사)
- 토키 신시로 (처음에는 타이 병부가를 잇고, 나중에 토키 렌큐가로 복귀. 2대 토키 덴에몬. 오쓰 성 전투에서 전사)
- 토키 겐베 (와타나베 세이자에몬의 아들. 코레미치의 사위)
- 토키 코레유키 (토키 진베. 토키 카와치노카미 코레겐 차남)
- 토키 '''렌'''큐 (토키 젠에몬. 코레유키의 아들. 사촌 덴에몬과 동명)
- 토키 코레요시 (토키 타지마노카미. 토키 칸게요 키쿠 차남)
- 토키 코레타네 (토키 미츠고로, 시에몬. 2대 토키 타지마노카미)
- 안도 이에타다 입도'''세츠'''창 (안도 키이노스케, '''렌'''코, 소추, 세츠소)
- 안도 '''렌'''미 (안도 젠나이에몬, 이에타다의 장남)
- 안도 '''렌'''젠 (안도 샤닌, 히타치노스케, 세츠쿠, 이에타다의 차남)
- 안도 '''렌'''타다 (안도 스케하치로, 키이노카미, 세츠코, 이에타다의 삼남)
- 안도 '''렌'''나오 (안도 히코에몬, 내장두, 안도 렌미의 아들)
- 안도 이에히사 (안도 스오노카미, 안도 이에타다의 동생)
- 안도 이에에이 (안도 스케고로, 이에타다 삼남, 안도 이에히사의 장남)
- 안도 노리히사 (안도 고로에몬, 안도 이에에이의 동생)
- 안도 코테이 (안도 셋츠노스케, 츠노스케, 안도 이에에이의 넷째 동생, 노리히사의 양자)
- 안도 '''렌'''신 (안도 주세이스케. 안도 렌마츠의 동생, 안도 이에타다의 숙부)
- 안도 죠지 (안도 이치인, 키스케, 렌신의 아들)
- 안도 죠히사 (안도 젠에몬, 죠지의 아들)
- 안도 '''렌'''지 (안도 또지로. 안도 렌마츠, 렌신의 동생, 안도 이에타다의 숙부)
- 타카노 다이젠 (타카노 다이젠료, 겐반윤)
- 우치다 시게츠구 (우치다 이즈미노카미, 자에몬다유, 소코)
- 우치다 시게나미 (우치다 민부쇼유, 시게츠구의 장남, 호만성에서 타카하시 카게타다 토벌 당시, 도세츠의 대역이 되어 화살을 맞고 전사)
- 우치다 시게타카 (우치다 데와노카미, 시게나미의 아들)
- 우치다 시게이에 (우치다 이키노카미, 겐죠, 겐코, 시게츠구의 차남)
- 우치다 무네츠구(우치다 '''렌'''만) (우치다 충병위, 츄에몬, 시게이에의 장남)
- 우치다 '''렌'''큐 (무네츠구(렌만)의 동생)
- 하라지리 시게키요 (하라지리 사마스케, 구나이쇼유)
- 모리시타 쵸운 (모리시타 빈츄노카미, 아들로 오노 시게노리, 타치바나 무네츠구)
- 모리시타 키칸 (모리시타 다쿠미, 쵸운의 동생)
- 이케베 나가아키라 (이케베 류에몬)
- 이케베 사다마사 (이케베 히코자에몬, 나가아키라의 동생)
- 호리 쇼 (호리 에치고노카미 토운켄 교쿠인)
- 호리 히데시 (호리 하치로, 지로에몬, 마타스케, 쇼의 장남)
- 호리 모리 (토키 로쿠에몬, 쇼의 차남. 처음에는 타이 병부를 잇고, 다음은 토키 덴에몬 가문, 마지막은 형의 뒤를 잇는다)
- 요시다 '''렌'''마사 (요시다 사쿄 또는 요시다 우쿄료. 처음에는 카네마사. 이와야 성 전투에서 전사)
- 우스키 무네카츠 (타치바나 요자에몬)
- 니타 시게자네 (니타 카모노스케, 헤이에몬)
- 타지리 시게하루 (타지리 카와치 입도 존테츠)
- 코구시 나리하루 (코구시 오쿠라)
- 코구시 나리모토 (코구시 신파치로, 나리하루의 동생)
- 사쿠라이 마사츠구 (사쿠라이 카가 입도 소치쿠사이 쇼하쿠)
- 에비나 히데세츠 (에비나 탄스케)
- 사노 무네유키 (사노 효부쇼유, 처음에는 코가미노 카츠요시)
- 이시마츠 마사유키 (이시마츠 야스에이)
- 타케사코 카게타네 (타케사코 휴우가노카미 마사타네)
- 타케사코 무네타네 (타케사코 고로베 노리후사, 카게타네의 장남)
- 타케사코 '''렌'''타네 (타케사코 신시베, 무네타네의 동생)
- 아다치 '''렌'''야스 (아다치 츠시마노카미 나오시, 나리츠구, 소엔)
- 쿄토 시게나리 (쿄토 카가 우에몬)
- 쿄토 시게야스 (쿄토 고로쿠에몬, 시게나리의 아들)
- 고토 타네나가 (고토 신고에몬, 하야토노스케)
- 고토 '''렌'''타네 (고토 이치야타, 하야토노스케, 타네나가의 아들)
- 고토 타네토 (고토 신고에몬, 이와야 성 전투에서 전사)
- 와타누키 요시카네 (시월 초하루 사산베에)
- 오하시 케이린 (오하시 쿄린, 도세츠의 군사, 참모)
- 타치바나 이에하루 (타치바나 아와지 입도 젠쵸. 처음에는 오무라 씨)
- 시미즈 '''렌'''겐 (시미즈 토에몬)
- 타하라 치카도 (후쿠아리 빈고노카미)
- 이데 '''렌'''도 (이데 시치로자에몬)
- 시라이 나리타다 (시라이 시가스케, 헤이자에몬)
- 키즈키 시게토시 (코레히사 카즈사노스케, 나카츠카사쇼유)
- 타카기 켄쇼 (타카기 고로베, 나가토노카미, 겐쇼)
- 이나바 오쿠라 (이나바 오쿠라쇼유쇼)
5. 1. 무장 일람
'''굵은 글씨'''로 표시된 "'''연'''", "'''설'''"이 들어간 인물은 도세쓰(간렌)에게 편휘를 받은 인물이다.- 야스타케 호세이 (하코자키 좌주 법인, 카메키쿠마루, 토지 시게안, 도세츠의 양자)
- 타치바나 무네하루 (토지 지로베, 도세츠의 양동생・토지 치카유키의 아들)
- 타치바나 무네츠구 (모리시타 산다유, 모리시타 쵸운의 삼남, 타치바나 무네하루의 양자)
- 타치바나 시게요시 (타치바나 엣츄노카미. 원래 지쿠젠 타치바나 씨 분가)
- 타치바나 시게유키 (야마모토 칸에몬 소칸. 원래 지쿠젠 타치바나 씨 분가, 어머니는 도세츠의 이복 여동생)
- 타치바나 무네토키 (야스타케 야자에몬 미치키요, 야스타케 호세이의 형, 도세츠의 양자)
- 타치바나 시게자네 (토지 우에몬다유, 료킨, 토지 치카시게의 차남)
- 타치바나 카네사다 (토지 나오사다, 탄조노츄, 타치바나 시게자네의 동생)
- 타치바나 이에하루 (타치바나 아와지 입도 젠쵸. 처음에는 오무라 씨)
- 우스키 무네카츠 (타치바나 요자에몬)
; 타치바나 쌍익
- 정장: 유후 코레노부
- 기장: 오노 시게유키
- 부장: 코모노 마스토키, 요네타비 시게히사
; 타치바나 사천왕[515]
- 유후 코레노부
- 토키 렌사다
- 안도 이에타다
- 타카노 다이젠
- 오노 시게유키 (안도 이에타다 은퇴 후 교체)
- 코모노 마스토키 (타카노 다이젠 은퇴 후 교체)
- 요네타비 시게히사 (유후 코레노부 은퇴 후 교체)
; 도세츠 칠 가신
- 유후 이에츠구
- 호리 쇼
- 토키 렌슈
- 안도 이에에이
- 유후 코레노부
- 모리시타 쵸운
- 안도 이에타다
텐쇼 10년(1582년) 11월, 도세츠, 무네토라의 타치바나 씨의 명맥 계승 축하연을 타치바나 성에서 개최했을 때 참석자(부젠 각서)
- 좌열
- * 야스타케 호세이
- * 오노 시게유키
- * 타치바나 시게자네
- * 요네타비 시게히사
- * 타치바나 카네사다
- * 토지 엣츄노카미 시게요시
- * 토지 칸에몬 시게유키
- * 타치바나 무네하루
- * 탄 한자에몬 치카츠구
- * 모리시타 나카츠카사
- * 토지 로쿠로
- * 타지리 요사에몬
- * 오노 나리유키
- * 키도 키요타네
- 우열
- * 오다베 신스케
- * 유후 코레노부
- * 코모노 마스토키
- * 오다 토우야
- * 유후 코레아키
- * 토키 렌슈
- * 호리 히데시(센치요)
- * 타카기 겐쇼
- * 하라지리 사마스케
; 타치바나 가문 사십팔 매
: 도세츠는 차반 전투에서 흰 매가 군기 위에 모여 승기를 이끌었다는 이유로[516][517], 그 이후 집안의 정예 가신 48명을 한 팀으로 구성했다. 노쇠, 병사 또는 전사로 인해 구성원은 불특정[518]
5. 1. 1. 다치바나 가문
요약(summary)에 내용이 없어, 원본 소스(source) 또한 빈칸이므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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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悅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33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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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友興廃記、戸次軍談の伝える「生の松原合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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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二 筑前国所々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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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二 高橋秋月挑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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猫城合戦(福岡県中間市上底井野)「森鎮実不覚、討ち死多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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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前戦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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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次軍談』『橘山遺事』『陰徳太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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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二 筑前国所々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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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ヶ城夜襲之事「岩屋城結束強化の契機となった。北原鎮久の誅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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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前鷹取城跡 福岡県直方市大字頓野・永満寺所在中・近世城郭の調查 · Volum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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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三 小金原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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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悅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33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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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像郡誌. 中編 宗像記追考』本書第十六 小金原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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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悅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33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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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31 藩史稿本類・士民ノ事績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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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悅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33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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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国史 : 原名・筑後将士軍談 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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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留米高良山合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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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留米市史 第6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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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五 黒木落城付所々軍之事 P.4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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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悅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33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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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六 道雪病死諸将退陣之事 P.43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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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史話』第一卷 人物篇(其の一)1 道雪公の片麟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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薙刀 銘 豊州高田住平家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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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前戦国史 新装改訂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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薙刀 銘 豊州高田住平家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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脇指 無銘(雷切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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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次鑑連雷斬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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雷切丸「被雷した戸次鑑連の太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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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戸次鑑連斬雷事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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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柳河藩志》第三章・藩治、第三節・藩政、第二・軍政組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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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柳川藩志』上卷 第五章 行政 第一節元亀・慶長時代187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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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齋公御咄之覺」《旧柳河藩志》第五章・行政、第二節・柳河再城時代 P.192; [[岡茂政]] 著《柳川史話》第二卷人物篇第117[[山崎美成]]の「夜談録」に《立花家旧記》から「立齋公口述次第」(「立齋公御咄之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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炎の軍扇立花道雪改訂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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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前覚書』(二)豊州芸州御戦ひの次第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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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友興廃記」巻第十七 宗像合戦之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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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前覚書』(五)立花御籠城の次第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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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柳川藩志』中卷 第十五章 寺社 第四節 三橋村 第一県社 高畑の三柱神社 469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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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光院殿月窓大禅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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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孝院殿如栄妙忠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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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姬。繁林宗昌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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卒守院殿貞林松壽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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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岳院殿覚志芳心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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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窓院殿貞梅法香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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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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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次孫五郎。子に[[立花統春|立花次郎兵衛統春]]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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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柳川藩志』第三章 藩治 第六 柳河の立花家略系130頁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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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像郡誌.中編 宗像記追考』P.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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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樹院殿満誉慶円大禅定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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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龍院殿月叟妙渭(意)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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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문서
15歳で早世
[212]
문서
12歳で早世、生母は不明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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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花宗茂正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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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林院殿月桂清香大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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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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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河戦死者名譽錄』(一)豊前馬ヶ嶽 大永六年三月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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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次鑑連初陣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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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七 戸次鑑連初陣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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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註名将言行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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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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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河戦死者名譽錄』(二)肥後車返(車帰) 天文四年秋月日未詳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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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帰し軍之事「青年武将 戸次鑑連の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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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八 車返軍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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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70 東京太田文書 四 戸次鑑連書状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悦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 安東舍人允(連善)殿
[225]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古所山最前攻登、小者一人被疵候、粉骨之次第感悅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七月十九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226]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8) 戸次鑑連(道雪)感状写 於今度木原碎手、被遂分捕候事、忠貞無比類、必追而可感之候、恐々謹言、十一月廿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227]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1 安東家史料 二一 御書写 (26)戸次鑑連感状写 今度於木原碎手、被深手候事、忠旨無比類候、必々追而可感候、恐々謹言、十一月廿日 安東助八郎(連忠)殿
[228]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21小野文書 四九 戸次鑑連感状写 於今度木原被碎手被深手候御忠儀無比類候、銘々達上聞候条、定而直可被成(平出)御感候、為鑑連茂忘脚不可有之候、心緒必追而可申述候、恐々謹言、十一月廿日、小野大蔵少輔殿 信幸
[229]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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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五)豊後海邊(海部郡) 弘治二年六月三日
[231]
서적
『旧柳川藩志』第十八章 人物 第十四節 柳川人物小伝(四)高野大膳
[232]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58 立花家旧臣文書 高野文書 三 戸次鑑連感状写 今度小原本庄以下之衆御成敗之刻、最前切入被疵被遂分捕候、高名無比類候、当時闕所依然々、不顕志候、口惜候、先夫丸壱人相加進候、恐々謹言、五月十九日 高野玄蕃允(大膳亮)殿
[233]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58 立花家旧臣文書 高野文書 八 戸次鑑連感状写 今度小原本庄以下之衆御成敗之刻、最前切入被遂分捕候、粉骨之次第、高名無比類、為無足辛労之段、曾而無忘卻候、必闕所次第一所可申談候、其間之儀、月充申付候由、存知候、恐々謹言、五月廿八日 高野九郎兵衛大尉
[234]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由布文書 (5) 戸次鑑連(道雪)知行預ヶ状写 今度小原本庄以下之衆御成敗之砌、最前切入、遂分捕被疵候、粉骨感悅候、近年度々被致分捕、殊数ヶ所被疵候事、忠貞無比類候、當時闕地等依無差儀、然々不顕志由、口惜候、先以緒方庄之内小迴四貫分之事預進之候、可有知行候、恐々謹言、弘治弐年辰丙九月四日 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235]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1 安東家史料 二二 御書之写 (3)戸次鑑連知行預状写 今度小原本庄以下之衆御成敗之砌、最前切入被疵候粉骨、感悦候、近年度々於所々在々先立被尽辛労、数ヶ所被疵候事、忠貞無比類候、當時闕地等依無差儀然々不顕志候、先以宇目村下河内之内三貫分之事預進候、可有知行候、恐々謹言 弘治二年丙申九月四日 安東助八郎(連忠)殿
[236]
서적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八 秋月文種自害附種実没落之事
https://dl.ndl.go.jp[...]
[237]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31 藩史稿本類・士民ノ事績 (40) 戸次鑑連(道雪)感状写 今度秋月文種於宅所最前切入、剩被疵粉骨之次第、高名無比類、必以時分可賀之候、恐々謹言、七月七日、 後藤市彌太(種長)殿
[238]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70 東京太田文書 三 戸次鑑連書状 今度秋月文種於宅所最前切入、剩被疵候、粉骨之次第高名無比類候、必以時分可賀之候、恐々謹言、七月七日 安東助八郎(連忠)殿
[239]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55田尻惟敏家文書 附・安東家文書 八 戸次鑑連感状写 今度秋月文種於宅所、最前切入、剩被疵候、粉骨之次第高名無比類候、必以時分可賀之候、恐々謹言、七月七日 安東又次郎(連之)殿
[240]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4) 戸次鑑連(道雪)感状写 今度秋月文種於宅所最前切入、剩数ヶ所被深手、粉骨之次第高名無比類候、必以時分可賀之候、恐々謹言、七月十一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241]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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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河戦死者名譽錄』(六)筑前古所山 弘治三年七月八日
[243]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31 藩史稿本類・士民ノ事績 (41) 戸次鑑連(道雪)感状写 今度於筑紫宅所被勵粉骨、殊被疵之忠貞之次第、感悦無極候、必以時分可顕志之、恐々謹言、八月廿三日、後藤市彌太(種長)殿
[244]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 由布文書 (6) 戸次鑑連(道雪)感状写 今度於筑紫宅所、別而被勵粉骨、数ヶ所被疵候、忠貞之次第、感悅無極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八月二十三日、由布源五左衛門尉殿 雪下事
[245]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70 東京太田文書 六 戸次鑑連感状 今度於筑紫宅所、別而被勵粉骨、数ヶ所被疵候、忠貞之次第、感悦無極候、必以時分可顕志候、恐々謹言、八月廿三日、安東舍人允(連善)殿
[246]
서적
筑前戦国史
[247]
웹사이트
許斐山城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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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宗像記追考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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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香春岳城争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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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간행물
『陰徳太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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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八 豊前国所々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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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8由布文書(10)戸次鑑連感状写
[253]
간행물
『福岡県史資料. 第9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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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旧柳川藩志』第十八章 人物 第十三節 柳川人物小伝(三)由布雪下
[255]
서적
『柳川藩叢書』第一集 (九五)略伝小伝(二十)由布惟信小伝
[256]
서적
『萩藩閥閲録』卷六十一 桑原文書 小原隆言書状
[257]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立花文書『戸次道雪譲状』
[258]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55田尻惟敏家文書 附・安東家文書 七 戸次鑑連感状写
[259]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1安東家史料 (29)戸次鑑連感状写
[260]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二四 大友宗麟書状
[261]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一〇 大友宗麟書状
[262]
서적
『吉弘文書』永祿五年十月二十日大友宗麟書状(大友宗麟資料集)戸次鑑連・吉弘鑑理十三日大里合戦の戦功や苦労を賞す。『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後編)127 吉弘家文書 四 大友宗麟書状
[263]
간행물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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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서적
『豊津町史』第四編 中世(鎌倉・室町・安土桃山時代) 第四章 戦国時代の豊前国 二 大友氏と毛利氏の衝突 松山城の攻防(『浦文書』・『萩藩閥閲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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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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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次鑑連剃髪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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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三 足利義輝御内書
[268]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四 大館晴光副状
[269]
서적
『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二 聖護院道澄書状
[270]
간행물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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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川史話』第一卷 人物篇(其の一)1 道雪公の片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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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国史・筑後将士軍談』由布大炊助惟時(惟明)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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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大友義鎮筑後国退治之事、下田城責堤貞元降参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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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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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史料編V近世文書(前編)58 立花家旧臣文書 高野文書 二 戸次鑑連感状写
[275]
서적
『旧柳川藩志』第十八章 人物 第十三節 柳川人物小伝(三)由布雪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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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川藩叢書』第一集 (九五)略伝小伝(二十)由布惟信小伝
[277]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立花城度々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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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河戦死者名譽錄』(七)筑前寶滿山 永禄十年七月七日
[279]
간행물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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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高橋三河守野心之事、斎藤鎮実攻筑紫広門附広門降参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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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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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河戦死者名譽錄
[283]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一三 大友宗麟書状 追而申候、今度之合戦別而被盡粉骨、舍弟中務少輔(鑑方)・同兵部少輔(鑑比)・刑部少輔(親繁)・隼人佐(親宗)・右京亮(親久)、其外家中之仁等、戦死之由承候、鑑連御朦氣令推察候、就中隼人佐事、此節可有同陳之由承候之条、雇かし申候之處、結句立用候、不便之儀候、于今ハ雖不入儀候、其砌頻抑留可申物をと申事候、雖然連無恙候之条、宗麟安堵難盡筆紙候、弥至彼子孫被加諫被取立候ハ、如何程も可有之之条、於于今ハ可被散愁霧候、此方氣仕之段過校量候、殊如風聞ハ、至山隈在陣之由承候、尤以肝要候、先陳通路等然々候ハねは笑止之儀候条、雖無申迄候、先陳又従当陳日田玖珠之通道輙樣才覚専候、前日如申候、人数等可入砌候間、一勢可差立哉之由申候キ、急度加勢之儀不可有油断候、此度之弓箭大綱之儀候、此節作外聞候ハねハ、永々当家之失行事候、相構なく三人之事者可有堅固事所希候、さて秋月振舞之事、無念中々不及申候、宗麟鬱憤之儀、猶以不浅候、何樣可遂本望事不可有別儀候、殊更筑後衆歴々戦死之由候、是又朦氣深重候、彼飛脚申分者、三池源十郎、田尻中務太輔事、其夜於鑑連同所心懸依感心、至彼両人鑑連着料一腰遣之由、承候、案中候、定而武具等可為大望候哉、雖不然々候、自然之時之用所と存、誘置候、若用所もやと存、打物一腰進之候、金あハひ大かたに候すると存候、御秘蔵者可為満足候、濃々雖申度候、彼飛脚差急帰遣候間、不細書候、一両日中態可差遣一人之条、其境節可申之趣、猶宗鳳可申候、恐々謹言、 九月八日 戸次伯耆守殿
[284]
문서
九州諸将軍記、筑前国続風土記
[285]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286]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287]
웹사이트
休松の戦い(休山茄子城合戦)戸次家中戦死者の眞相
https://web.archive.[...]
[288]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秋月城軍之事、休松軍之事
https://dl.ndl.go.jp[...]
[289]
서적
筑前戦国史
[290]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後編)119 由布(功)家文書 六 大友宗麟袖判軍忠一見状 永禄十一年七月四日立花鑑載被討果、彼城落去之砌、戸次伯耆守鑑連手之衆或分捕被疵粉骨、或戦死忠儀之次第、着到銘々加披見訖
[291]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二二 大友宗麟書状 前四立花城落去之通、預注進候、鑑連・鑑理、忠儀之段者不及申候、諸軍之粉骨、無比類候、如此之嶮難、輙挫候事、他邦之覚、外聞、不可過之候、然者彼城普請等、雖無申迄候、諸勢被申諫、早々可被取誘事、頼存候、彼山之事、於其堺者第一之儀候間、則時人数差籠、堅固可申付覚悟候、各辛労之儀、必以使節、諸軍忠貞之次第、可申遣候、先以従両人能々可被申觸候、殊怒留湯主殿助事、急速可差下候、各別而可被添心事、可為祝着之段、相心得可被申候、為御存知候、恐々謹言、 七月九日 吉弘左近大夫殿 戸次伯耆守殿
[292]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一一 大友宗麟書状 以小野弾介・清松内蔵助、条々承候之趣、得其意、何茂調進之候、諸軍被申進、弥堅固之才覚肝要候、今度至立花被取詰候之砌、比山嶮難之条、氣仕千萬存候處、賢略之行等無油断故、無程被取崩、結句於道待、鑑載被討留、頸到来、大慶本望候、彼悪党落口等迄堅依被申付候、不抜足候之事、敵方之聞、喜悦候、如此之調、晝夜之御辛労、不及申候、猶吉岡越前入道可申候、恐々謹言、 七月廿三日 吉弘左近大夫殿 戸次伯耆守殿
[293]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一四 大友宗麟書状 度々如申候、今度立花城之事、別而依被励粉骨、立花鑑載其外数多被討捕、彼城輙屬案中候、寔御忠貞無比類候、此等之儀為可申、染筆候、弥堅固之才覚可為祝着候、猶大津留主税助申含候、恐々謹言、 八月七日 戸次伯耆守殿
[294]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295]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296]
서적
戦国時代の筑前国宗像氏
[297]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三一 大友宗麟軍忠一見状 永禄十一年七月廿三日、寶満之者共差下候之刻、於宇美、河内、戸次伯耆守鑑連手之衆、分捕高名之次第着到、銘々加披見畢、
[298]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299]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立花鑑載野心付葦屋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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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301]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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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秋月種実降参之事
https://dl.ndl.go.jp[...]
[303]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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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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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서적
豊前覚書
[306]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大友宗麟攻龍造寺兩家遂調和付江上貞種義死之事
https://dl.ndl.go.jp[...]
[307]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中國勢攻立花城付大友勢後詰之事
https://dl.ndl.go.jp[...]
[308]
간행물
福岡県史資料. 第4輯 立花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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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310]
웹사이트
多々良川の戦い 戸次鑑連の奮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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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三二 大友宗麟軍忠一見状 永禄十二年五月十八日、立花表於敵陣、長尾岸渥防戦之砌、戸次伯耆守鑑連親類・与力・被官、或分捕高名被疵、或戦死之着到、銘々加披見訖、
[312]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 筑前多々良浜接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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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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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서적
豊前覚書
[315]
간행물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 中國勢立花退陣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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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55田尻惟敏家文書 附・安東家文書 一二 戸次鑑連知行預ヶ状
1574-12-13
[317]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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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 高橋鑑種降参付高橋家別立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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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간행물
豊前覚書(二)豊州芸州御戦ひの次第
[320]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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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간행물
豊前覚書(二)豊州芸州御戦ひの次第
[322]
서적
筑前戦国史
[323]
간행물
豊前覚書(三)芸州衆御退治成され候てより筑前一国鑑連樣御守護成され候間の次第
[324]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 戸次鑑連筑前國守護職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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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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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웹사이트
鑑連公御戦攻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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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웹사이트
鑑連公御戦攻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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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웹사이트
旧柳河藩主立花家文書-〔御亡者様御名幷御寺等書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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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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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웹사이트
紹運の智略「柴田川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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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서적
筑前戦国史 柴田川の戦い
[332]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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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간행물
豊前覚書(五)立花御籠城の次第
[334]
간행물
柳河戦死者名譽錄(一四)筑前宇美並障子嶽之間 天正六年十二月十一~十三日
[335]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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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서적
筑前戦国史
[337]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一 岩屋合戦関内記勇戦之事
https://dl.ndl.go.jp[...]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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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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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서적
筑前戦国史
[340]
웹사이트
二日市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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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柳河戦死者名譽錄(一五)筑前鍬摺 天正七年 三月十三日
1579-03-13
[342]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二 豊後勢與秋月筑紫挑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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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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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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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웹사이트
安楽平落城 筑前大友五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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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後編)131 藩史稿本類・士民ノ事績 (45) 戸次道雪感状写
Unknown
[346]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後編)131 藩史稿本類・「旧柳川藩誌」十時文書 二 戸次道雪感状写
Unknown
[347]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1 安東家史料 二一 御書写 (33)戸次道雪感状写
Unknown
[348]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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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서적
筑前戦国史
[350]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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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서적
筑前戦国史
[352]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1 安東家史料 二一 御書写 (32)戸次道雪感状写
[353]
간행물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55田尻惟敏家文書 附・安東家文書 一三 戸次道雪感状
[354]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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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간행물
豊前覚書
[356]
간행물
柳河戦死者名譽錄
[357]
서적
筑前戦国史
[358]
간행물
柳河戦死者名譽錄
[359]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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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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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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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像記追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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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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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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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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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간행물
柳河戦死者名譽錄
[366]
웹사이트
大友興廃記、戸次軍談の伝える「生の松原合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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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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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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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간행물
豊前覚書
[370]
웹사이트
柑子岳城争奪戦 筑前大友五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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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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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서적
筑前戦国史
[373]
웹사이트
鷲ケ岳城 筑前大友五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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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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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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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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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서적
北肥戦誌
[378]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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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웹사이트
猫城合戦(福岡県中間市上底井野)「森鎮実不覚、討ち死多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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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간행물
柳河藩享保八年藩士系図・下 補遺 井手口 御感状書出之写
[381]
웹사이트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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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서적
筑前戦国史
[383]
서적
戸次軍談、橘山遺事、陰徳太平記、近代実録
[384]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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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웹사이트
高鍋町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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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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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서적
筑前戦国史
[388]
웹사이트
龍ヶ城夜襲之事「岩屋城結束強化の契機となった。北原鎮久の誅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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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고문헌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二 北原種興誘討秋月勢事
https://dl.ndl.go.jp[...]
[390]
고문헌
大友興廃記 筑前國岩屋城責事付高橋紹運武略之事
https://dl.ndl.go.jp[...]
[391]
서적
筑前戦国史
[392]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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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394]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395]
서적
柳河享保八年藩士系図・上
[396]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39 薦野文書 一 戸次道雪感状 昨日廿七宰府於観世音寺口、増時僕従神五・吉徳砕手被疵之由候、感悅無極候、必可達上聞候、為愚老以時分何樣賀之可申候、恐々謹言、七月廿八日 薦野左近大夫殿(増時)
[397]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52 竹迫文書 四 戸次道雪知行預ヶ状写 昨日廿七宰府於観世音寺口親父五郎兵衛尉(統種)戦死、高名忠節難盡紙面候、併愚老力落無是非候、必随而可達(平出)上聞之条、御感不可有餘儀候、仍為家恩於郡中三町分之坪付有別紙事預進之候、可有知行候、恐々謹言、七月廿八日 竹迫龍寿(虎種)
[398]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後編)131 藩史稿本類・士民ノ事績 (48) 戸次道雪書状写 猶々、其元無油断勤番肝要候、一、昨日者早々越山、乍案中祝着候、併真労不及申候、其地江無易儀候哉、殊高鳥居へ責被合候由、肝要候、陣所等之儀、増時被得指南可然様可申談候、仍廣重事昨日同心候哉、心懸之次第悦喜申候、各着陣候ハ、、爰許へも用事多有之儀候間、廣重事者早々帰陣肝要候、恐々謹言、九月三日、 後藤市彌太(連種)殿
[399]
서적
高鍋町史 附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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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서적
筑前戦国史
[401]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402]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403]
서적
豊前覚書
[404]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405]
서적
筑前戦国史
[406]
웹사이트
石坂の戦い 八木山峠(福岡県飯塚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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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
고문헌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三 穂波合戦之事
https://dl.ndl.go.jp[...]
[408]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三三 大友義統軍忠一見状 天正九年十一月六日、於穂波表合戦之砌、戸次伯耆入道道雪家中之衆、或分捕高名、或被疵戦死之着到、加披見訖、
[409]
고문헌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三 小金原合戦之事
https://dl.ndl.go.jp[...]
[410]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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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고문헌
筑前國續風土記 卷之第二十六 古城古戦場 三 鞍手郡 小金原
https://www.nakamura[...]
[412]
고문헌
立花遺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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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고문헌
宗像郡誌. 中編 宗像記追考 本書第十六 小金原合戦之事
https://dl.ndl.go.jp[...]
[414]
웹사이트
小金原の戦い「立花道雪激怒」「宗像氏貞苦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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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서적
豊前覚書
[416]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417]
서적
筑前戦国史
[418]
서적
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三四 大友義統軍忠一見状 天正九年十一月十三日、於山東宗像表合戦之砌、戸次伯耆入道道雪家中之衆、或分捕高名、或被疵戦死之着到、令披見訖、
[419]
고문헌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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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서적
豊前覚書
[421]
서적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三 小金原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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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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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서적
筑前戦国史
[424]
서적
『宗像郡誌. 中編 宗像記追考』本書第十六 小金原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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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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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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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筑前戦国史
[428]
서적
筑前戦国史
[429]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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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서적
筑前戦国史
[431]
서적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四 高橋紹運取返米山付統虎初陣石垣山合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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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
서적
柳川市史
[433]
서적
筑前戦国史
[434]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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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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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
서적
筑前戦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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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許斐山城の戦い「八並村吉原口の戦い」:天正11年3月15~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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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439]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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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서적
『旧柳河藩主立花家文書-(鑑連公系譜之事など合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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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筑前戦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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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四 筑紫広門燒岩屋城付屋山防禦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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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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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豊前覚書
[445]
서적
筑前戦国史
[446]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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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서적
柳川市史
[448]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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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서적
豊前覚書
[450]
서적
筑前戦国史
[451]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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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
서적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四 立花道雪忠言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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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
서적
柳川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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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筑前戦国史
[455]
서적
『筑後将士軍談』 卷之第十五 道雪紹運筑後出張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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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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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筑前戦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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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豊前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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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川市史
[460]
서적
柳川市史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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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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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서적
筑前戦国史
[463]
서적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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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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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河戦死者名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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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筑前戦国史
[467]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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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
서적
立花遺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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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
서적
豊前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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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471]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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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
서적
筑前戦国史
[473]
서적
柳河戦死者名譽錄
[474]
간행물
郷土資料 第1 歴史之部
http://dl.ndl.go.jp/[...]
[475]
서적
筑後将士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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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
서적
筑後将士軍談
https://dl.ndl.go.jp[...]
[477]
웹사이트
久留米高良山合戦
https://web.archive.[...]
[478]
서적
筑前戦国史
[479]
웹사이트
"立花道雪」と「白鷹」「立花道雪卒去の前兆とされる出来事」"
https://web.archive.[...]
[480]
서적
井樓纂聞 梅岳公遺事
https://kotenseki.ni[...]
[481]
서적
筑後将士軍談
https://dl.ndl.go.jp[...]
[482]
웹사이트
立花道雪の死(1)
https://web.archive.[...]
[483]
웹사이트
立花道雪の死(2)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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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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鑑連雷山塁:豊後大野市大字田中字北「戸次鑑連:雷に撃たれた場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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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樓纂聞 梅岳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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脇指 無銘(雷切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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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次鑑連雷斬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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雷切丸「被雷した戸次鑑連の太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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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将士軍談』 卷之第九 戸次鑑連斬雷事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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刀 無銘 兼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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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註名将言行録』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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鑓 銘 兼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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薙刀 銘 豊州高田住平家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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葦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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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史話』第一卷 人物篇(其の一)1 道雪公の片麟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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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齋公御咄之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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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우스키 아키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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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요시히로 아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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